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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6.21 반창의성 편지(The Anticreativity Letters)
사랑하는 후배에게

창의성이라는 적을 무찌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일은, 자네 의뢰인이 만나는 사람들을 제한하는 일일세.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은 분야의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도록 해야 되네.

자기와 다른 분야에서 아주 흥미진진한 작업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과의 교류는 쓸모없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심어줘야 하네.

소설가, 음악가, 시장 상인, 기업가, 외국인 노동자, 괴팍한 시인, 다른 전공의 학자, 용접공, 이런 사람들과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피하게 만들기만 하면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분명 우리 것일세.

친숙함이라는 심리적 달콤함을 자극해서 자기 분야의 사람들하고만 밥 먹는 습관을 길러주는 것이 특히 중요하지.

기업이든 대학이든 정부든, 조직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게 만드는 법도 마찬가지라네.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게 만들게나.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예술을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멀리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최고 무기임을 잊지 말게.

그대의 의뢰인이 이런 쓸데없는 데 빠져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좋아한다면, 자네의 착각일세.

영감의 무한한 원천이 철학과 문학과 예술에 있다는 비밀을 자네는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그가 철학에 관심을 보이거든, 철학이란 경험적 근거가 미약한 관념들의 집합이라고 유혹하면 되네.

대신 자극적이고 간결한 자기계발서를 손에 쥐어주게.

베스트셀러 목록(꼭 한국어 목록이어야 하네)을 슬쩍 보내줘도 좋아.

단 한 권의 소설도, 단 한 권 시집도 꽂혀 있지 않은 책장을 미니멀리즘이라거나 실용주의라고 치켜세워주는 것도 잊지 말게나.

창의성이 한 개인의 속성만이 아니라 그가 자라온 사회와 그가 속한 조직의 문화적 산물이듯이, 진부함도 그렇다는 것 정도는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우리의 최대 우군은 냉소적이고 과도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선배와 동료들이네.

이들을 조직의 곳곳에 배치해두게.

그들은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내면 그 즉시 그 아이디어의 문제점을 수십 가지로 지적할 수 있다네.

그들의 주특기를 적절히 빌리게나. 그들의 특기는 어떤 아이디어든 이미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떠들면서 상대의 기를 꺾어버리는 것이지.

이런 우군들이 조직에서 득세하게 되면, 인간들은 의식의 수평선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려고 하는 순간, 마치 적이 눈에 띄면 즉시 사살하는 것처럼 그 아이디어를 스스로 자동 사살해버린다네.

우리로선 할 일이 없어진다는 뜻이지.

이런 조직에는 우리의 적이자 원수인 창의성이 침투할 틈이 없다네.
 
마지막으로, 이건 최근 들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비법이니 잘 들어두게나.

노력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유전자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게. 모든 것이 유전자만의 힘이라고 믿게 만들란 말일세. 노력이나 훈련, 수련, 문화, 태도, 이런 것들은 죄다 구시대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믿게 만들게. 생물학적 결정론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기만 하면 엄청난 효과를 볼걸세.

‘최근 연구’라는 이름으로 창의성, 지능, 행복, 건강, 이 모든 것은 유전자의 산물이라고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이 중요하네.

우리 같은 영적인 존재들은 이미 알고 있는 비밀, 즉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 올바른 태도,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훈련,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의 힘을 절대로 믿지 않도록 해야 되네.

우리 연구소에서 발견한 최근 연구이니 꼭 명심하게나.

끝으로, 자네가 한국 사회에서 거둔 눈부신 성공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 계속 노력하게나.

자네를 아끼는 지혜로운 선배로부터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출처: [최인철의 프레임] 진부함에 이르는 비법, http://www.hankookilbo.com/v/feefde66c00c43be9648dcaa61163dd2)

 
이 글은 최인철 교수님이 리처드 니스벳이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반창의성 편지(The Anticreativity Letters)”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우리의 문화적 습관을 거꾸로 직시할 수 있도록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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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춘몽 장춘몽